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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노하우/역사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조선 무기 시리즈 3 날아가서 폭발하는 조선의 화포

by 섯거라 2018. 11. 15.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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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조선 무기 시리즈 3 날아가서 폭발하는 조선의 화포

    조선의 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조선 선조대에 화포장이던 이장손(李長孫)이 처음 발명하였는데요. 

    기존 조선의 화포가 타격위주의 무기였던 것에 반해 현대의 포탄처럼 포격점에서 폭발하도록 갖추어진 일종의 포탄이예요

    둥근 박모양의 형태로 표면은 무쇠로 되어 있었고, 내부에 화약과 철편(빙철)을 채워 넣어 폭발하면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적군을 척살하는 용도의 무기였어요. 

    현대의 수류탄이나 크레모어처럼 파편으로 적을 섬멸하는 무기인 셈이죠.

    이 비격진천뢰의 발사는 대완포구나 중완포구를 이용하였는데요.

    1. [조선무기]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는 중완구(中碗口) 
      16:33:42

    비격진천뢰의 지름은 21cm정도에 둘레가 68cm정도 되었고, 도화선을 감는 둥근 그릇과 얇은 철조각과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비격진천뢰에 대해서 이서(李曙)가 지은 화포식에서는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양은 박과 같이 둥글고, 부리는 네모가 졌다. 그 부리에는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어서 내부에 도화선인 약선을 감는 목곡(木谷)이 있고 목곡에 들어가는 죽통(竹筒)이 있으며 내부에는 빙철(憑鐵:철조각)이 채워진다. 특히 목곡은 폭발할 시간을 조정하는 장치로 그 재료는 단목(檀木)을 사용하였고, 골을 나사모양으로 파서 빨리 폭발시키려면 열고비를 감고, 더디게 하려면 15고비를 감았다. 중약선을 감아 죽통에 넣어 한끝은 죽통 아래 중심에 꿰어 놓고 다른 한 끝은 죽통 위 개철 밖으로 내되 두치를 넘지 않게 한다. 이 때 죽통과 개철 주위에 홈이 생기지 않도록 종이로 밀봉한 뒤 화약은 허리구멍으로 채워 넣고 격목으로 구멍을 막은 뒤 안구에 실어 발사하되 불꽃을 막으려면 진천뢰 심지에 불을 붙이고 나서 완구 심지에 불을 붙인다."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톡톡한 성과를 보였는데요.

    선조실록에서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선조 25년 9월1일에 박진이 경주를 수복할 때 비격진천뢰를 성 밖에서 발사하여 큰 효과를 보았는데요. 

    조선군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쏘자 이 게 뭔지 몰랐던 적들이 구경하느라 서로 밀치며 엉겨붙어서 구경하다가 비격진천뢰가 터져서 적장을 포함한 20명이 그자리에서 바로 즉사하여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네요.

    임진왜란하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빼 놓을 수 없는데요.

    이순신장군도 이 비격진천뢰를 이용해서 계사년에 웅포해전에서 육상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승리를 거두었다는 군요.

    이 이외에도...

    임진년 7월 고경명 의병군이 금성을 공격할 때, 계사년에 우배선 의병군이 향교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계사년의 2차 진주성 전투와 정유년 남원성 전투에서도 사용하는 등, 널리 활용하였다. 유성룡의 《진사록》에서 임진년 10월 기사를 보면 북쪽 지방에도 이미 비진천뢰가 각 지역 무기고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정만록》에서 중인이었던 저자가 1592년 6월 용인 전투 패전을 논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장손이 수년 전에 비진천뢰를 만들어 쏘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실제 비진천뢰 발명 시기는 임진년 이전이 될 확률이 높다. 안동의 김해 의병대는 특이하게도 계사년 2월 24일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진천뢰를 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향병일기》참조

    현재 남아 있는 비격 진천뢰는 육군박물관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것과 , 경남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고현성지에서 발굴된 것과 진주성지에서 발굴된 파편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석마리에서 발굴되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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